156화

156화 “유중혁?”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암흑성 2층의 ‘별종’들 중에 가끔 이 ‘시험’의 악마로 강림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멸살법’에서 읽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핑키즈 김영팔이 끼어든 회차에서 백작급 악마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소환되자마자 유중혁은 왜 찾는 거지? 내가 대답이 없자, 악마 녀석이 후욱― 하고 숨을 뿜더니 이현성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면, 네놈이 유중혁인가?” “······전 이현성입니다.” “그럼 유중혁이라는 놈은 어디 있지?” 지켜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괜히 여기서 백작급 악마를 자극해 봐야 좋을 건 없었다. “그놈은 왜 찾는 거야? 여긴 없으니까 돌아가.” 내 까칠한 말투에 악마 백작 텐타치오가 흐흐 웃었다. “벌레 녀석이 말대답을 하는 구나. 그것 참 이상하군. 여기에 ‘서울 최강’이란 놈이 있다고 들었는데?” 서울 최강? “어······ 그거 내 얘기 같은데.” 그 말에 일행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왜들 그런 눈으로 보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인데. 텐타치오도 나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유중혁이 아니라고 했지 않느냐?” “유중혁은 아닌데, 아무튼 서울 최강은 나야.” 대체 뭔 일일까. 이 자식이 ‘서울 최강’은 왜 찾는 거지?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에게 미안해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제발 저 악마를 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매금지존?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갑자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왔다. [당신이 신라 출신의 성좌들을 노려봅니다.] [신라 출신의 성좌들이 당황합니다.] 역시 그렇군. 이 자식들이······ 지금 자기들 후손 살리겠다고 날 팔았다 이거지? [성좌, ‘매금지존’이 자초지종을 보여줍니다.] 머릿속으로 ‘매금지존’이 본 기억의 일부가 내게 스며들었다. 타격으로 전신이 묵사발이 된 민지원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고 있었다. ―서울 최강은······ 유중혁이란 남자야. [성좌, ‘매금지존’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지금처럼 성좌가 자신의 기억을 직접 보여주는 행위는 개연성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코인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도 내게 서슴없이 기억을 보여줬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는 거겠지. 젠장, 그럼 유중혁한테 보낼 것이지 왜 나한테 보낸 거야? 내가 만만하냐?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허공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도와주면 뭐 해줄 건데?” [성좌, ‘매금지존’이 코인을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또 2천 코인 주려고?” [성좌, ‘매금지존’이 당황합니다.] “다른 거 줘. 도움이 될 만한 거.” [자존심 상한 신라의 성좌들이 ‘매금지존’에게 성토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에게 설화를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설화? [새로운 ‘현상금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악마 퇴치> 분류 : 서브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악마 백작 ‘텐타치오’를 처치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신라 출신 성좌들의 신뢰, 역사급 설화 1개 실패시 : ― + 역사급 설화 하나라. 상당히 괜찮은 조건이었다. 사실, 딱히 저쪽에서 조건을 걸지 않아도 악마 백작은 잡아 줄 생각이었다. 신라 출신의 성좌들은 성운을 이룰 만큼 강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빚을 지워둬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뭐, 어차피 잡아야 할 놈이기도 하고. 기다림에 지친 악마 백작이 으르렁거렸다. “뭘 혼자 웅얼대고 있는 거냐? 그래서 네놈이 유중혁이란 거냐, 아니란 거냐?” 텐타치오의 전신에서 강력한 기류가 방출되자, 이현성이 잽싸게 앞으로 나섰다. “독자 씨, 저 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현성 씨, 혼자론 무리······.” “이젠 결코 탄피를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한수영이 재미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텐타치오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씩 웃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놈들이군. 나는 그런 녀석들을 짓밟는 걸 좋아하지.” “너도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 쿵, 하는 지진파가 발생함과 동시에 [강철화]를 전개한 이현성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까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로 뒤덮인 이현성의 어깨가 텐타치오의 어깨 뿔과 충돌했다. 백작급 악마에게 물러서지 않고 덤벼들 용기라니, 이현성답다. “설화를 계승한 녀석이구나?” 이현성의 [강철화]는 ‘강철의 주인’이 가진 설화를 계승하면서 얻은 성흔. 단 한 방의 교류로 악마 쪽도 이현성의 가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백작’급이면 이제 슬슬 ‘설화’의 가치에 눈을 뜰 때니까. “먹어 치워주마.” 텐타치오가 이현성의 몸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콰각! 콰가각! 놀란 이현성이 연이어 주먹을 날렸으나, 텐타치오는 개의치 않았다. 쩍 벌어진 악마의 입에서 송곳니가 도드라지더니, 그대로 이현성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드드드드득! [강철화]의 강도는 곧 이현성의 의지와 직결되어 있다. 의지가 부서지지 않는 한, 이현성의 강철은 파괴되지 않는다. ‘멸살법’에는 물론 그렇게 적혀 있다. 하지만 그런 멋드러진 설명이 어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반부’의 이현성이었다. 콰드드드득! 이현성의 단단한 강철에,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조금씩 창백해지는 이현성의 표정. “······저놈 대체 뭐야?” 텐타치오를 보는 한수영의 눈빛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김독자! 저놈 뭐냐고!” 도깨비가 발표한 서울 랭킹이 잘못되진 않았나 보다. 여기서 ‘악마 백작’의 정확한 수준을 알 수 있는 존재는 나를 제외하면 한수영 뿐이었다. 내가 대답했다. “저놈은 ‘3급 악마종’이야.” 그리고 3급 이상의 악마종들은, 자신의 ‘설화’를 가지고 있다. [3급 악마종 ‘텐타치오’가 설화 ‘벌레 학살’을 이야기합니다.] 벌레 학살. 꽤 쓸만한 설화다. 아직 ‘성흔’의 형태로 가공된 것 같진 않지만, 스스로 쌓아 올린 설화인 만큼 그 힘은 화신들의 성흔을 능가한다. 쿠오오오오. 텐타치오의 설화가 허공에 풀려나기 시작하자, 이현성과 한수영을 비롯한 모든 화신들이 굳어버린 벌레처럼 제자리에 멈춰섰다. 뒤쪽에서 아직 기절해 있던 이지혜와 이길영이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고, 핑키즈 김영팔은 이미 거품을 물고 주저앉아 있었다. 이것이 ‘설화’의 진짜 힘. 연고가 없는 다른 존재를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삼키는 것. 강제로 몰입된 화신들이 설화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살의 시간이다. 벌레들아.” 콰콰콰콰콰! 이현성의 강철이 무력하게 부서져 나갔고, 반사적으로 덤벼든 한수영의 분신들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이대로라면 전멸이었다. 설화 [벌레 학살]은 다수의 약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니까. 지금의 일행들에게 암흑성 2층의 백작급은 무리다. 꽈아앙! 나는 뒤쪽으로 튕겨져 나온 이현성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 손이 닿자, 공포에서 풀려난 이현성이 말을 더듬었다. “도, 독자 씨.” “물러 서세요.” “안 됩니다. 이번에도 독자 씨를 지키지 못하면―” “탄피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잘 보고 있어요.” 나는 걱정 말라는 듯 이현성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텐타치오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내 ‘설화’에 저항했다? 제법 정신력이 강한 놈인가 보구나.” “정신력 문제가 아냐.” “그럼 뭐냐? 꿇어라, 버러지야.” 쿠구구구구구. 주변의 압력이 급격하게 올라가며 일행들이 무릎을 꿇었다. 물론, 나는 멀쩡했다. 태연하게 걷는 나를 보며 텐타치오가 당황했다. [제4의 벽]의 성능 덕분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차이였다. “······대답해라.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그 설화 얻으려면 허약한 놈들만 골라서 최소 10만 명은 죽여야 했을 텐데, 너도 어지간히 고약한 놈이네.” “뭐?” 말하자면, ‘격’의 차이. “그래도 [벌레 학살]은 꽤 쓸만한 설화야. 적이 자신보다 ‘약자’일 때는 말이지.” 파츠츠츠츳! [당신은 설화 ‘벌레 학살’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벌레 학살’의 효과가 당신에게 부정당합니다.] 텐타치오가 눈을 부릅떴다. “최소 후작급 이상의······ 설마 마왕? 아니, 그럴 리는 없고······ 설마 귀환자냐?” 악마종들의 정점인 72 마왕은, 격으로 따지자면 설화급 성좌들과 동급이다. “하지만 귀환자가 암흑성 1층에 있을 리 없는데······.” “맞아. 둘 다 틀렸어.” ‘격’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 존재. [당신이 ‘악마 백작 텐타치오’를 바라봅니다.] 텐타치오의 안색이 희게 질리고 있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텐타치오를 향해 달려가며 [백청강기]를 사용했다. [‘신념의 칼날’을 활성화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신성’으로 변환됩니다.] 기이이잉! 간만에 뽑아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감촉이 낯설었다. 스가각! “끄아아아!” 뿔 끝이 잘려 나간 악마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두 번째 검격을 날리기도 전에 텐타치오는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설화를 사용할 수 없어도 백작급. 몸놀림 자체가 보통의 화신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 여유를 되찾은 녀석이 이를 악물었다. “성좌라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또 [메시아의 길]을 또 빌려올까 잠시 고민했지만, 저쪽이 [벌레 학살]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나도 ‘인용’을 남발할 필요는 없었다. ‘인용’ 횟수의 제한도 있고, 무엇보다 ‘설화’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의 내 능력치를 확실히 알아볼 필요도 있었다. 우선, 능력치 조정부터 좀 해야겠지. 어디보자. [체력 Lv.62 -> 체력 Lv.90] [근력 Lv.60 -> 근력 Lv.90] [민첩 Lv.60 -> 민첩 Lv.90] [마력 Lv.62 -> 마력 Lv.90] [모든 종합 능력치가 크게 증가합니다!] [총 116,400코인을 소모했습니다.] 엄청난 지출이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당신의 육체가 인간의 한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가공할 에너지가 당신의 육체 속에서 들끓습니다!] [모든 종합 능력치가 시나리오 제한 기준에 도달하였습니다!] 카페인을 수혈 받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전신의 아드레날린 수치가 급격히 증가했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평균 레벨 90의 능력치. 현재 화신들 중 이만한 능력치를 가진 존재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건 성좌인 나만 할 수 있는 돈지랄이니까. “자, 그럼 간다.” 나는 거침없는 검격을 퍼부으며 전진했다. 까드드드드득! 칼날에 닿은 텐타치오의 몸이 찢어졌다. 급격하게 상승한 능력치를 이용해 놈의 몸 곳곳을 난자했지만, 텐타치오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아마도, 남은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 자신의 육체를 강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화가 안 먹히는 상황이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 텐타치오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발악을 시작했다. 난타전이 벌어지자 내 몸에도 하나둘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시, 스킬 없이 싸우면 이 정도구나.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전용 스킬, ‘소형화 Lv.3’을 발동합니다!] [소형화의 효과로 당신의 육체가 줄어듭니다.] “무슨······!”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선택하겠다.”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과 흡사함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등장인물의 격이 당신보다 높습니다.] [활성화되는 스킬의 레벨이 강제로 조정됩니다.] 평소라면 여기서 메시지는 끝이었다. 그런데 한 줄이 더 있었다. [당신의 격이 크게 상승하여 해당 인물과의 동조율이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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