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128화 흔히 <스타 스트림>의 최강자는 ‘성좌’라 꼽힌다. 모든 이야기의 꼭대기에서 세계를 관음하는 자들. 하지만 언젠가 말했듯, 성좌만이 성좌와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좌의 격을 얻을 수 있음에도 그 길을 거부하고 마의 정점에 오른 마왕이 있는가 하면, 태생부터 괴수종의 정점에 군림하는 용(龍)들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가? 마의 길도, 인외의 길도 걷지 않는 인간들은, 과연 성좌와 대적할 수 있는 격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의 대답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흥미롭군. 다른 행성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포기한 자인가.] 키리오스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내 정체까지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는 내 곁에서 혼절한 아스카 렌을 보며 말했다. [그 용기를 봐서 한 번은 넘어가 주마. 그 여자를 데리고 꺼져라.] 귀환자. 특별한 재능을 타고 태어나, <스타 스트림>의 축복 속에서 인간을 초월한 자들. 그중에서도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은 특별한 존재였다. 귀환자 중에서도 아주 강력한 힘을 얻어, 도깨비들이 만든 이야기의 인력(引力)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격을 획득한 존재. ‘멸살법’ 전체를 통틀어도 그런 귀환자는 채 열이 되지 않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 초월의 격에 이른 스킬들이 일제히 개화하며 나를 향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성좌급의 존재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필멸자를 멸할 수 있다. [그대는 내게 말을 걸 위치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 안에 이렇게 많은 수분이 있었다는 것에 깜짝 놀랄 만큼, 순식간에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감히, 나 역설(逆說)의 백청(白淸)에게?] 강하다. 필멸자가, 그것도 소인이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하지만 내게는 ‘벽’이 있다. 벽 너머에 아무리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다 한들, 그가 벽을 넘어오지 못하는 한 내게는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등장인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그쯤 되자 키리오스도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버텼다? 어떻게? 다른 높은 격의 수호라도 받는 건가?] 나는 그가 엉뚱한 관심을 가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키리오스. 이 세계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키리오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나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그 작은 녀석도 그러더니······.] 그러자 그 ‘작은 녀석’이 응답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눈물을 글썽이며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바라봅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에게 1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짜증난다는 듯, 키리오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필요 없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아기 오줌 같은 빗방울 몇 개가 똑똑 떨어졌다. [······모든 세계는 멸망의 때가 있고, 모든 이야기는 끝나는 순간이 온다. 이 행성에게는 지금이 그때인 거지.] 먼 곳을 바라보는 키리오스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설령 세상 모든 것에 둔감해진다 해도, 자신이 쌓은 ‘이야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럼 왜 이곳에 다시 오셨습니까? 이미 오래전에 [피스 랜드]를 떠나셨던 분이.” [······뭔가가 나를 불렀다.] 나와 키리오스의 눈이 쓰러진 ‘아스카 렌’을 향했다. 아마도 키리오스가 느끼는 그 감각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은 고향을 지키러 이곳에 돌아왔지 않습니까?” [이곳에 좋은 기억 따윈 없다. 이곳은······.] “당신을 ‘약하게’ 태어나게 만든 곳이니까요?” 처음으로, 키리오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에게 저주받은 몸뚱이를 선물한, 빌어먹을 모성(母星)이기 때문입니까?” [····고작 시나리오의 화신 주제에 나에 관해 잘 알고 있군. 마지막으로 말하지. 꺼져라. 세 번은 없······.] “겁먹으신 겁니까?” [무어라?] “겁먹으셨냐고 물었습니다. 이곳을 찾아와, 당신의 세계를 유린하는 저 성좌들에게, 저 간악한 ‘뱀’에게 겁먹은 거냐고 물었······.” 쿠구구구구! 순간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하마터면 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죽고 싶은 거라면, 죽여주마.]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속이지 마십시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정의를 힐난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시나리오 간섭 행위를 엄중히 지탄합니다.] 연이어 떠오른 간접 메시지에, 일순 키리오스의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희한한 놈들이 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구나. 원숭이 왕에 대천사까지? 이상한 일이군. 그 자존심 강한 녀석들이······.] 입술에 고인 피를 뱉으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얘기에 집중하십시오. 이 행성의 마지막을 보러 오셨지 않습니까?” [나는 이 행성을 도울 수 없다.] 파츠츠츳. 그의 몸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개연성 후폭풍. 아까 두 명의 풍영대를 죽인 영향이었다. 시나리오의 필요로 소환된 존재가 아닌 그는, 저 하늘의 성좌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 손 위로 튀는 스파크를 힘껏 그러쥔 키리오스가 말했다. [내가 개연성을 감수하고 먼저 손을 쓴다면, 이 행성의 멸망을 앞당길 뿐이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성좌급의 존재들에게 개연성이란 저울과 같다. 어느 한쪽이 타당한 개연(介然) 없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꾼다면, <스타 스트림>의 법칙은 강제적으로 그 저울의 평형을 맞추려 든다. [내가 시나리오에 간섭하게 되면, 시나리오를 지켜보던 다른 성좌들도 움직일 개연을 얻는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고향의 마지막을 담아가는 것뿐이다.] 기억난다. 저것이 내가 아는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진짜 모습이다. 고향을 떠나 무수한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돌아왔으나, 너무나 강해진 대가로 자신의 고향을 구하지 못하게 된 자. 그것이 바로 역설(逆說)의 백청(白淸),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다. “당신이 직접 손을 쓸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거였다면, 나는 키리오스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슬슬 천기(天機)가 당신에게 제자 설화를 요구하고 있을 텐데, 아닙니까?” 그 침착한 키리오스조차 이번만큼은 크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저를 제자로 삼으십시오. 당신의 대리인이 되어 [피스 랜드]의 재앙을 물리치겠습니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뿐이었다. [······나는 외인(外人)은 제자로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내 힘을 이을 자격이 부족해.]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만약 여기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유중혁이었다면, 키리오스는 망설이지 않고 나를 제자로 받았을까? “그 자격, 이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근처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기이이잉! [백청강기]의 마력이 고스란히 빨려 나가며, 새파랗게 일렁이는 마력의 파랑이 내 칼끝에서 넘실거렸다. 아직 부족한 위력이었지만 그 성취를 보이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키리오스의 눈빛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두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구매했던 히든 스킬. 백청강기(白淸罡氣)는 바로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성명절기였다. “다시 인사드리지요. 백청문(白淸門)의 문외(門外) 제자, 김독자가 사문의 어른을 뵙습니다.” . . 키리오스가 결정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난 후였다. 전신에서 타오르던 백청의 기운을 해제한 그는, 인간의 육성으로 입을 열었다. “백청문은 내가 떠나고 멸문했을 텐데. 아직도 문하가 남아 있을 줄은 몰랐군.”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사람을 두 시간이나 세워두다니. 스타 스트림의 강자들은 오랜 세월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고유 시간’ 속에 산다는데,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좋다. 너를 제자로 받겠다.” 키리오스는 내가 어떻게 백청강기를 익혔는지, 또 어떻게 그의 비사를 알고 있는지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수련이 시작되었다. *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은 ‘무림계 귀환자’였다. ‘소인’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불세출의 노력을 겸비했던 그는, 시스템의 도움 없이 무공을 터득해 자신의 종족을 초월하는 것에 성공한다. <제1 무림>에 진출해 절대 고수로 군림한 그에 관한 전설은 여럿이 남아 있다. 자신보다 키가 큰 마교도를 모두 죽여버린 일이라든가, 키를 가지고 놀리는 맹주의 남근을 잘라버린 일이라든가, 개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성좌 ‘뱀을 베는 자’와의 인연으로······.」 “······네 스마트폰은 같이 작아졌네?” 다가온 한수영의 목소리에, 나는 스마트폰을 끄며 일어섰다. “아공간 코트에 넣어 놨더니 이렇게 됐어.” “젠장, 하여간 좋은 건 혼자 다 가진다니까.” 툴툴대는 한수영은 무사히 풍영대를 따돌리고 우리와 합류하는 것에 성공했다. 자기 딴에는 역시나 ‘죽은 척’이 먹혀들었다는데, 나 역시 속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제1 무림> 최강자 ‘키리오스’가 피스 랜드 출신이었다니, 상상도 못했네.” “최강자가 가려진 건 아니지만, 최강에 제일 가깝긴 하지. 그런데 알고 있었나 보네?” “초반부에도 이름은 나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거야 나도 처음이지. 아무튼, 렌 데리고 근처에서 기다려.” 나는 키리오스의 가르침을 받아 기암괴석 지대의 진법 속에서 그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내 목표는 2주 안에 키리오스의 비전절기를 익힌 후 ‘왕성 베로니카’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원작의 진행대로라면 일본 왕인 ‘여덟 머리의 군주’가 4개 왕성 전체를 짓밟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그즈음일 것이다. 물론, 예상대로 일이 쉽게 풀릴 리는 없었다. 나를 가르치기 시작한 첫날, 키리오스가 내게 시킨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걸 백만 번 해라.” “······백만 번이요?” “그래, 백만 번. 내가 방금 보여준 건 제대로 봤겠지?” 보긴 봤다. 키리오스는 내 앞에 단정한 자세로 서더니, 그대로 검을 뻗어 허공을 내질렀다. 기본적인 ‘찌르기’ 자세였다. “이걸 왜······.” “모든 백청의 무공은 여기서 시작한다. 가장 ‘작은 점’을 여는 것. 극도로 응축되고 절제된 하나의 ‘점’에서, 우주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군요.” 뭔 말인지 모르겠다. “너처럼 커다란 족속으로 태어난 존재들은 ‘작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겠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키리오스는 자신의 키에 콤플렉스가 있다. “인간도 별로 큰 편은 아닙니다만.” “그래, 내가 말하려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결국 우주적인 견지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티끌만도 못해. 그러니, 소인을 소인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도 소인도 결국은 먼지에 불과하니까.” 어쩐지 자신의 ‘작음’을 우주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큰 먼지와 작은 먼지는 다르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먼지의 크기가 아니라 우주의 크기다. 티끌에 불과한 존재라 해도, 얼마나 커다란 우주를 인식하느냐에 따라 존재의 격은 달라질 수 있지. 아니, 오히려 작을수록 우주의 근원(根源)에 더 가까운 셈이니 오히려 본질을 이해하기에 더 유리한 셈이다.” 멋있는 소리 같아서 나는 일단 맞장구를 쳤다. “아하.” “이해했느냐?” “근데 그게 찌르기랑 무슨 상관입니까?” 나를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키리오스가 말했다. “······이래서 태생이 큰놈들은 안 된다니까. 찌르기나 열심히 해라.” 키리오스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마도 내게 실망한 듯했다. 그럴 법도 하지. 내 저질스러운 재능이야 [바람의 길] 때 이미 충분히 증명된 바였고, 그러니 정말로 무공을 익히려 했다가는 2주는커녕 몇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나흘이 지났다. “똑바로 해라. 태생이 구리면 노력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냐?” 다시 닷새가 지났으며. “이래서 큰 몸으로 태어난 놈들은······.” 일주일이 흘렀다. 여전히, 키리오스의 대인(大人) 혐오는 그칠 줄을 몰랐다. “차라리 벌레로 태어나지 그랬느냐? 아마 바퀴벌레도 네놈보단 잘 배울 것이다.” “그런 바퀴벌레가 있다면 스승으로 삼고 싶군요.” “죽고 싶으냐?” 그리고 마침내 이주째 저녁이 되던 날. 나는 찌르기를 하다가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다. “네놈은······.” 여전히 나는 스킬을 배우지 못했다. 내 재능에 크게 실망한 키리오스는 한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간 모양이었다. 키리오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스카 렌과 한수영을 찾았다. “도망가자.” “뭐? 다 배웠어? 아까 보니 하나도 못 하던데?” “다 훔쳤어.”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뭔가를 읇조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내 주변에서 강렬한 백청의 뇌전이 튀며 기운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키리오스의 비전 절기, [전인화(電人化)]였다. “엑? 그거 뭐야? 분명 아까는······.” “말했잖아. 훔쳤다고.” [5번 책갈피에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추가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내 목적은 이것이었다. 최강의 귀환자 키리오스를 내 [책갈피]에 넣고, 이해도를 최대한 끌어 올려 놓는 것. 애초에 키리오스는 날 제대로 가르칠 의향도 없었을 것이다. 키리오스 같은 강자들은 내 감언이설 몇 마디에 속아 자신의 진신절기를 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목적은 그저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나를 여기에 잡아두는 것일 테고, 시나리오가 끝난 후 나를 고문해서 내가 아는 정보들을 캐낼 속셈이겠지. “그러니까 빨리 도망가야 돼.” “젠장, 알겠어.” 투덜거린 한수영이 채비를 끝내는 사이, 멀리서 해가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새벽녘의 온기가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피스 랜드]는 2주마다 한 번씩 계절이 바뀐다. 분명 수련을 시작할 때는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봄이 오고 있었다. 아스카 렌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그때였다. “······‘여덟 머리의 군주’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정말입니까?” “그가 [절대 왕좌]로 일본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지. 동면을 청했던 생명체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봄. 바야흐로, ‘뱀 사냥’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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