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117화
메시지와 함께, 시나리오의 내용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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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시나리오 # 6 ― ????? >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
제한시간 : ???
보상 : ???
실패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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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난이도랑 클리어 조건이 없는데?”
“······이거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전부 물음표잖아?”
당황한 사람들이 몇 번이고 창을 재호출해 보았지만, 여전히 시나리오의 내용은 물음표로 도배되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시나리오는······.
“이번 시나리오는 일부 인원들만 수행할 수 있다는군요.”
목소리가 들려온 쪽에 키가 큰 중년인이 서 있었다.
“당신은······.”
“오랜만입니다, 김독자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이 아저씨도 여기에 있었군.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남자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전일도입니다. ‘중립의 왕’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김독자입니다.”
중립의 왕 전일도.
미륵왕 차상경, 미희왕 민지원과 함께 ‘절대 왕좌 쟁탈전’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울의 왕 중 하나.
나 역시 전일도에 관해서는 인상 깊은 기억이 있었다.
‘왕좌 쟁탈전’ 당시, 그는 유일하게 스스로의 의지로 왕좌를 포기한 왕이었으니까.
“왕좌 쟁탈전 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독자님의 활약은 무척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제 배후성이 독자님에 대해 얼마나 떠들어 대는지 모릅니다. 독자님 반만 하라고 말이죠.”
전일도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배후성이 누구였더라?
나는 곧장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특성이랑 배후성만 포함한 요약 일람으로.
[요약 일람 설정이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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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전일도
전용 특성 : 어설픈 지식인 (일반), 중립의 왕 (영웅)
배후성 : 양다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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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보고 나니 왜 봤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양반이라면 당연히 이 성좌였을 텐데. ‘양다리 전문가’는 얼핏 보면 내연 관계가 복잡한 구닥다리 성좌일 것 같지만, 실은 ‘왕’의 수식언이다.
[중립 외교를 제창하는 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양다리 전문가’가 당신에게 호의를 드러냅니다.]
양다리 전문가는 조선의 국왕이자 중립 외교의 달인으로 유명했던 ‘광해군’의 수식언이었다.
괜히 전일도의 특성이 ‘중립의 왕’이 아닌 것이다.
“방금 하신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은데요. ‘일부 인원’만 시나리오를 수행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아,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역시 정보가 빠른 왕들은 뭔가 아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아는 것으로 치면 내가 제일 잘 알긴 하겠지만, 그래도 들어 둘 필요는 있었다. 혹시나 내가 아는 ‘멸살법’과 달라졌을 수도 있으니까.
“오전에 하급 도깨비들이 밝힌 정보에 따르면, 이번 시나리오는 지원자를 따로 뽑는다고 합니다.”
“지원자를요?”
“예. 이번 시나리오는 모두가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참가하지 않아도 패널티도 없고요. 이제껏 있었던 시나리오들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조건이죠.”
역시, 내가 아는 것과 같군.
나는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참가자들은 저곳으로 가게 되는 거겠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전일도의 말을 훔쳐 들었는지, 곳곳에서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전부 안 가도 되는 거야?”
“시발, 다행이다. 나 저 괴수 보고 좀 지렸는데······ 뭐가 저리 커?”
이쯤 되면 시나리오의 화신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눈치를 살피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부류.
그들은 대부분 소속이 없는 사람들로, 이제 살았다고, 적당히 묻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시나리오는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아마도, 그들은 시나리오에 참가하지 않은 대가로 끔찍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재밌겠는데?”
그리고 두 번째 부류.
그들은 이미 시나리오의 가혹한 환경에 어느정도 적응한 자들이었다.
스크린을 보며 다짐을 굳히거나, 자신의 장비를 미리 점검하는 사람들.
아마 그들은 ‘당분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전일도 님! 어디 계십니까!”
인파 바깥에서 전일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일도가 시계를 보더니 신음을 흘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가보시죠. 저는 괜찮습니다.”
“아뇨,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의미가 없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김독자님, 사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을 모시기 위함입니다.”
“저를 말입니까?”
전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없는 세계.”
그는 그 말을 하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순간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눈치챈 듯, 전일도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불행한 세계에 남겨진 왕들이, 당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류.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
나는 전일도를 따라 왕들의 집결지로 향했다.
그들은 용산역의 중앙 플랫폼에 모여 있었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회의실은 거대한 천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천막 주변은 수십 명의 보초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녀석들.
아마 왕들이 키운 정예인 듯했다.
우리가 신유승과 싸울 때, 아마 저들은 다른 지역에서 난립하는 괴수들을 사냥하고 있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지금부터는 ‘왕’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보초의 제지에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듯, 정희원과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업고 있던 유상아를 이현성에게 잠시 맡겼다.
“독자 씨.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비명 질러요. 알겠죠?”
정희원이 저렇게 말해주니 정말 든든하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준 후 천막의 문을 열어젖혔다.
[해당 지역에는 음파 차단 스킬이 걸려 있습니다.]
얼씨구, 음파 차단까지?
제법 그럴듯한 구색은 갖춘 모양인데······.
안으로 들어서자, 넓직한 공간에 원형의 테이블이 갖추어져 있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테이블 위에는 육포와 비스킷 몇 점도 놓여 있었다.
앉아있는 의자들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플라스틱 의자였고, 누구는 원목 의자, 아예 소파를 통째로 가져온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앉든, 그들이 앉은 곳은 분명 옥좌였다.
살아남은 왕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그룹이 가는 게 유리하다고 말했잖나? 한국은 후발주자야.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녀석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우리 그룹이 간다면 다르네. 내가 간다면······!”
쩌렁쩌렁 울리던 중년인의 목소리가, 나의 등장과 함께 사그라졌다.
모든 왕이 나를 보고 있었다.
“마지막 왕이 오셨군요.”
미희왕 민지원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인사하며, 왕들을 둘러 보았다.
유중혁은······ 없군. 하긴, 당연한 일인가.
참석한 왕들은 나를 제외하고 총 다섯 명이었다.
미희왕 민지원.
미륵왕 차상경.
중립의 왕 전일도.
방랑자들의 왕.
이렇게 넷에, 나머지 하나는······.
이상하다.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자넨 누군가?”
“김독자입니다.”
“아, 자네가······ 허흠, 흠. 나는 여의도의 대통령 ‘유현호’라고 하네.”
······여의도의 대통령?
대통령은 이미 죽었을 텐데 뭔 헛소리지?
민지원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유현호 씨는 왕은 아니지만 한 세력을 이끌고 계셔서 일단 이곳에 참석하셨습니다.”
“왕은 무슨! 다들 진짜로 지금이 조선시대인 줄 아는 건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어. 제발 정신 차리게!”
나는 곧바로 [등장인물 일람]을 요약 버전으로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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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현호
전용 특성 : 부패한 정치인 (희귀)
배후성 : 국정농단의 달인
전용 스킬 : [뇌물 수수 Lv.5], [군세 지휘 Lv.4], [부패한 권력 Lv.6], [대중 장악 Lv.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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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기억이 날 것도 같다.
국회의사당에서 첫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살아남은 정치인.
분명 몇몇 회차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
보통은 괴수 범람 때 여의도가 지워지면서 죄다 사망하는 게 정석인데,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부패한 조선의 관료에게 분노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화신 ‘유현호’를 싫어합니다.]
뭔가 싶었는데, 아마 유현호의 배후성 때문인 것 같다.
조선의 관료 중 국정 농단의 달인이 누구였더라······.
유상아가 있었다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리고 이쪽의 ‘이수경’씨도······ 비슷한 이유로 참석하셨습니다.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방랑자들의 왕’이라 불리시는 분입니다.”
방랑자들의 왕이 나를 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 가면을 잠시 응시하다가, 좌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개는 그만하면 됐으니, 저를 부른 용건을 알고 싶은데요.”
내 말에, 테이블 중앙의 좌석에 앉은 전일도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여섯 번째 시나리오’에 참가할 대표들을 선출할 생각입니다.”
역시 그런 목적이었나.
전일도의 말을 받은 것은 유현호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현재 서울 돔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사람들일세. 김독자 씨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긴 하지만, 시나리오의 공헌도가 컸기 때문에 특별히 이 자리에 초청했으니, 영광으로 생각하게.”
“아······ 그렇습니까?”
특별히? 영광으로?
이거 웃기는 짬뽕이네.
내가 죽어라 시나리오 깰 동안 어디 숨어서 기회나 엿보던 자식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유현호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제 야만에서 벗어날 때가 됐네. 잠깐 원시시대로 돌아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반복했지만, 우리 본질은 엄연한 사회계약설에 따라 행동하는 준법 시민들일세! 그러니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다음 시나리오 참가자를 뽑는 게 좋지 않겠나?”
그냥 허접한 개소리 같은데, 그럴듯한 단어들이 섞여 있으니 꽤 그럴듯한 개소리로 들린다. 민지원이 대답했다.
“어떤 민주적 절차를 말씀하시는 거죠?”
“아까 말했다시피, 세력의 크기에 따라 참가 인원을 배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곧바로 태클을 건 것은 전일도였다.
“단순히 숫자로 따지자면 여의도 세력의 수가 제일 많은 걸로 압니다만. 그건 형평성에 맞지 않는 제안입니다.”
“전일도 씨, 섭섭한 말을 하는군. 우린 결국 한민족 아닌가? 특정 세력의 인원이 많이 뽑히고 말고는 사실 중요하지 않네. 어차피 시나리오에 돌입하면 타국과 마주하게 될 건데, 그때가 되면 누가 어디 그룹이니 같은 얘기는 쏙 들어갈 거야. 적이 눈앞에 있는데 우리끼리 다툴 셈인가?”
그야말로 정치적인 물타기였지만, 전일도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누가 뽑히든 중요하지 않은 거라면, 굳이 그쪽 그룹을 많이 뽑을 이유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어험, 그러니까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세력이 많은 인원을······.”
나는 듣다가 짜증이 나서 끼어들었다.
“고작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모인 겁니까? 애초에 사람을 왜 가려 뽑는지 모르겠군요. 가고 싶은 사람들 다 보내 주면 될 텐데.”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상황이 좀 변했습니다.”
“변했다고요?”
민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나리오는 할당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요.”
······제한 됐다고?
“왕들은 도깨비한테 따로 메시지가 갔을 텐데, 아직 못 받으셨나 보네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울 돔의 초기 할당 인원은 총 10명입니다.]
[투입된 화신들의 시나리오 진척에 따라 추가 할당 인원이 결정됩니다.]
아하, 이래서 다툰 거였군.
시나리오를 두려워하는 다른 화신들과는 달리, ‘왕’들은 시나리오의 조기 선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약 초기 할당 인원에 자신의 세력을 투입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시나리오 주도권은 자신의 그룹에게 넘어온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결국, 이 자리는 왕들의 의자 뺏기 싸움을 위해 마련된 셈이다.
“내 그룹이 가겠어요. 해당 시나리오 지역에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신라의 후예인 내가 앞장서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아니, 내가 가야지. 백제는 예로부터 일본이랑 교류가 많았다고.”
“그건 백제고, 당신 배후성은 후백제 사람이잖아요.”
“다들 무슨 소린가? 당연히 내가 가야 하네. 어디서 그런 구닥다리 배후성들을 믿고······.”
“잠깐만, 여러분. 조금 진정하시고······.”
뒤늦게 전일도가 나섰지만 혼란은 중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곁을 돌아보는데, 방랑자들의 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반가면 사이로, 미묘하게 웃는 입이 보였다.
어디 내가 해결해보라 이건가.
기세가 오른 왕들은 이제 유혈사태라도 마다할 것처럼 사나운 분위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우리끼리 여기서 다퉈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그 말에 왕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부라리는 유현호.
나는 희미하게 울리는 땅의 진동을 느끼며 테이블 위의 비스킷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제야 오시는군.
왜 이렇게 늦나 싶었지.
“아직, 마지막 ‘왕’이 안 왔으니까요.”
내가 비스킷을 깨묾과 동시에, 천막의 한쪽이 폭발하며 자칭 여의도의 대통령이 비명과 함께 엎어졌다.
“끄아아악!”
엎어진 유현호의 등을 짓이기며 나타난 한 남자의 모습.
녀석이 뚫고 온 천막 뒤로 피를 뿜으며 너부러진 수십의 보초들이 보였다.
역시 우리의 회귀자답다.
몇 회차든 저 성질머리는 어디로 가는 법이 없지.
특유의 흉흉한 눈길이 좌중을 훑더니 이내 나를 향해 고정되었다.
“패, 패왕······!”
몇몇 왕들이 사색이 되어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패왕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다음 시나리오에 참가할 인원을 발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