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115화 성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있자니,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야기를 먹고, 이야기에 미쳐있는 자들. 저게 바로 성좌란 자들의 본성인 것이다. [죽음이란 이야기의 결말과 같아요. 스테이크가 된 소가 되살아날 수 없듯, 죽은 사람도 되살아 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것이니까요.] “예외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거짓 전승이에요. 예외는 없어요.] 거짓이라.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럴 때 쓰는 관용표현이 있다. “스틱스강에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 그녀는 맹세를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페르세포네의 표정에 분노가 떠올랐다. [······당신이 믿는 ‘영혼’은 그저 조잡한 이야기의 덩어리일 뿐이에요.] “제가 원하는 것도 그 조잡한 이야기의 덩어리입니다.” [명계에서 ‘뒤를 돌아보는 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어요. 당신은 흘러간 시간을 납득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겠군요.]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온다면, 나 역시 아껴뒀던 카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여왕님. 시간은 반드시 ‘앞으로만’ 흘러가는 게 아닙니다. 슬슬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순간, 세상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살벌한 기파가 홀 전체를 장악했다. 잠깐이지만, 나는 페르세포네의 진체를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발악하듯 외치고 싶었다. 이래도 영혼이 없다고? 이것 봐, 지금 내 영혼에 소름 돋았거든?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은 뒤에야, 기파는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페르세포네가 미소지었다. [후후······ 재밌어. 역시, 올림포스의 아이들이 말한 ‘특이점’답군요.] 하지만 그 미소는, 조금 전과는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자칫하면 골로가는 수가 있다. “제가 아는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타르타로스에서 개발 중인 거신병들을 보았습니다. 만약, 저와 거래하신다면 거신병의 완성 시간을 더욱 단축할 방법을······.” [그런 이야기는 됐어요. <기간토마키아>는 중요한 사안이긴 하지만, 거신병은 당신의 도움 없이도 제때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말 만만찮은 여신이다. 이번에는 페르세포네의 차례였다. [다만, 이런 거래라면 생각해 볼 수도 있겠군요. 당신이 어떻게 그 정보들을 알고 있는지 내게 말해준다면······.] “그건 곤란합니다. 솔직히, 제대로 설명할 자신도 없습니다.” 신유승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것만큼은 불가한 일이었다. 만약 이걸 공개하면, 앞으로의 내 계획은 모두 끝장이니까. 내 대답의 진심을 가늠하는 듯, 페르세포네는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기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의 ■■■는······.] ······뭐? 다음 순간, 내 귓가에 성좌들의 메시지가 폭발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귀를 의심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여왕의 경솔함을 지적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침음합니다.] 페르세포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불청객들은 조용히 하시죠.] 나는 놀라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아, 별거 아니에요.]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라니? 제대로 발음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내 귀에 그녀의 말은 필터링 된 정보로 들렸다. 시나리오상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보. 하지만 필터링은 이미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존재에게는 발동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멸살법’을 다 읽은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 아니, 어쩌면 저건······. [미안하지만, 여흥은 이쯤에서 접도록 하죠. 명계는 당신과 거래할 이유가 없어요. 나는 당신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거든요.] 희붐한 불빛에 비친 나이프가 선뜩하게 빛났다. 왜인지, 그 방법을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참았는데, 당신······ 제법 맛있어 보이거든요.]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온 페르세포네가 내 턱을 붙잡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싶은 것을 자제하며 미소지었다. “시나리오를 진행 중인 화신을 해하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텐데요?” [흐음. 이거 제대로 얕보였네. 겨우 그런 개연성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저를 지켜보는 성좌들도 그걸 용납하지 않을 거고요.” 그러자 페르세포네가 코웃음을 쳤다. [명왕께서 그런 하찮은 성좌들을 두려워할 것 같아요?] 물론, 하데스는 충분히 오만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하찮다’라는 말은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도발하듯 여의봉을 휘감아 쥡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냉엄한 눈으로 지고의 검을 꺼내 듭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신나서 상황을 부추깁니다.] 페르세포네도 지지 않고 기세를 발출했다. [그렇군요. 다들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거죠?] 순식간에 홀의 천장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붉고 푸른 스파크가 천둥처럼 내리치며 연회장 곳곳에 하얀 불길이 일었다. 이것이 성좌들의 기싸움. 쿠구구구구! 진체의 강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듯, 페르세포네의 상징체에서 막대한 아우라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새우등 터지듯 죽게 생겼다.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셨죠.” 이야기라는 말에, 성좌들의 기세가 한순간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이런 거래는 어떻습니까?”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페르세포네가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 절 도와주신다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여드리죠. 방금 먹은 그 스테이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건 당신을 먹게 해준다는 뜻인가요?] “여왕님의 미식력(美食歷)이라면, 더 이상의 식사는 필요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이미 충분히 배도 부르실 거고.” 내가 하려는 말을 벌써 눈치챈 페르세포네가 눈웃음을 쳤다. [······시식도 못 하게 하고 대가는 받아 챙기시겠다?] “시향은 하게 해 드리죠. 하지만 지금 저를 먹어치우시면, 여왕님은 남은 삶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아가실 겁니다.” [왜죠?] “그때 먹지 않았더라면, 분명 더 맛있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요.” 페르세포네의 눈빛에 흥미가 깃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나요?] “저는 배후성 없이도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페르세포네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저는 이계의 신격의 도움 없이도 귀환자를 해치웠고, 강림한 재앙들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고작 다섯 개의 시나리오가 지나갔지요.” 페르세포네의 윗입술이 애타는듯 아랫입술을 훔쳤다. “심지어는 살아있는 영혼으로 ‘명계’에 들어와 당신과 이렇게 조우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앞으로 뭘 더 할지, 정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말은 잘 하는군요. 하지만······.] 페르세포네가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그건 이미 ‘거래’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구애’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네?] 나는 씩 웃었다. “저는 진심이니까요. 당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뒤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질 만한 이야기를 보여주겠습니다.” 어쩌면 성좌들과 ‘거래’를 하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들은 영원에 구속된 자들. 하찮은 화신과의 거래에 진지하게 응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진심이 담긴 억지를. 그리고 모든 신화가 그렇듯, 때로 신들은 백 마디의 거짓보다 한 줌의 진심에 더 감동받기도 한다. 실제로 그녀는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흐음, 곤란한데. 이래서 수컷들은······.] “아, 물론 당신에게 하는 구애가 아니라 ‘부유한 밤의 아버지’께 하는 구애입니다.” 내 말에 페르세포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내게서 훌쩍 물러나더니, 테이블 위에 몸을 걸친 채 천천히 다리를 꼬아 앉았다. 은근한 눈길이 내 전신을 휩쓸었다. [재미있군요.] 유상아의 몸으로 저런 포즈를 하고 있다니, 돌아가서도 생각날까봐 무섭다. 허공의 어둠을 응시하던 페르세포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찰나였지만 몇 시간처럼 무거운 침묵.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내가 침묵의 무게에 조금씩 질식해 갈 무렵이었다. [당신에게 ‘과업’을 내리겠어요.] 그리고 올 것이 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여준다면서요? 성공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영혼을 찾아주도록 하죠.]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발동하였습니다.] 과업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신화가 몇 가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헤라클레스가 ‘12과업’이라는 걸 수행한 적이 있었지. 페르세포네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나도 한 번쯤은 내려보고 싶었어요. 올림포스 아이들은 자주 하는 짓거린데, 난 조신한 낭군님을 만나는 바람에 한 번도 못 해봤거든.] “어떤 과업입니까?” [당신의 과업은 뱀의 머리를 베어오는 거예요.] “······뱀? 설마 머리가 여러 개 달린 그 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살짝 소심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냐하면 ‘그 뱀’은 무려 2급 괴수종이었으니까. 페르세포네가 고개를 저었다. [히드라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걸 죽여봐야 헤라클레스 녀석을 따라했다는 소리만 들을 뿐이죠. 당신이 죽여야 할 뱀은 다른 곳에 있어요.] “하지만 저는 시나리오 진행 중이라 멀리 갈 수 없습니다만.” [그건 걱정말아요. 당신이 갈 곳에, 그 뱀도 있을 테니까.] 페르세포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빈 허공에 화면이 떠올랐다. 채널이 연결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그 화면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성좌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거였나? 녹색의 정글을 아우르는 거대한 숲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저곳은, 우리가 시작될 ‘여섯 번째 시나리오’의 무대였으니까. 그런데 잠깐만. 저거 뭐지? 「거기 아저씨, 여기 나무 좀 뽑고 쉴만한 곳 좀 만들어 봐. 당신 그런 거 잘 하잖아?」 「내가 잘 하는 건 투기지 개간이 아니다. 덜떨어진 계집애야.」 나는 그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라진 공필두와 한수영이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아직 여섯 번째 시나리오는 시작도 안 했을 텐데? 나를 빤히 바라보는 페르세포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때요, 해보겠어요? 꽤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과업’이라는 말을 붙일 만하거든요.] 나는 한발 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페르세포네가 원하는 ‘뱀’이 무엇인지 감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인기척이 사라진 후, 홀에 어둠이 몰려왔다. 혼자 남은 페르세포네는 남은 성찬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만 치워라. 맛이 없구나.] 어둠 속에서 나타난 손이 재빠르게 접시들을 가져갔다. 페르세포네는 접시에 담긴 음식들이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드마스터, SSS급 헌터, 10서클 대마법사······. 이미 지긋지긋하게 먹어 본 맛들. 허공의 어둠이 일렁이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세포네. 왜 그랬지? 마치 공간 그 자체가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 수줍은 내 낭군님께서 이제야 입을 여시네요.] ―왜 그랬냐고 물었다. [하데스, 당신이 이걸 원했잖아요.] ―나는 그런 적이 없어. 페르세포네는 그런 어둠을 빤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당신은 화신을 좀처럼 만들지 않으시죠. 그런 당신이, 유독 저 아이는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았는데. 제 착각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저 아이가 명계에 왔을 때 바로 쳐 죽이지 않으셨으니까요.] 어둠은 잠시 침묵했다. [늘 헤라클레스를 가진 제우스를 부러워하셨죠.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멋대로 낭군님 마음을 조금 읽어 봤답니다.] 페르세포네는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놀랍더군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성좌들도 있었어요. 그런 자들이 고작 화신 하나를 쫓아다니다니······.] 치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화면이 나타났다. 하지만 채널의 신호가 불안정한지, 화면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은 고독한 시선으로 그 화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후일(後日)의 징후가 나타날 거다. 후일. 그 말을 들은 페르세포네가 불신과 의심, 그리고 불안이 고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일이 정말 올까요?] ―아마도. [하지만 그때도 제 곁에 계셔주실 거죠?] 하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포근한 어둠이 따스한 기운을 품으며 그녀의 상징체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그 어둠을 느끼며,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저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몹시 기대되는군요.]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명계를 벗어나기 위해 어둠 속을 헤쳐가는 김독자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김독자.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페르세포네가 희미하게 웃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