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111화 올림포스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는 유상아의 표정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붉어졌다가, 창백해졌다가, 급기야는 새파래지는 유상아의 낯빛을 본 후에야, 나는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를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독자 씨.” 대체 무슨 쌍욕을 들은 것인지, 유상아는 나를 보며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괜스레 내가 미안해진다. “배후성들이 뭐라고 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유상아의 몸에서 파츠츠 전기가 튀었다. 아리아드네가 어지간히 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지난번 삼문답 교환의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이윽고 스파크가 잠잠해졌고, 유상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는 자기가 함부로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부유한 밤의 아버지. 그것은 올림포스의 3주신인 ‘명왕 하데스’의 수식언이었다. 올림포스의 3주신 중 하나지만, 명계에 상주하기에 성운의 대성좌인 ‘올림포스 12신’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성좌. 하긴, 고작해야 위인급 성좌인 아리아드네가 접촉하기에 하데스는 너무 격이 높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는 일단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유상아 씨.” “그런데 독자 씨, 혹시······.” 똑똑한 유상아는,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하데스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을 것이다. 내가 하데스를 찾는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겠지.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되살리기 위해 명계를 찾아갔던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신화니까. “······가능한 건가요?”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죽은 사람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나야 ‘불살의 왕’의 효과로 개연성 보정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런 보정이 없다. 신유승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무분별한 부활이 가능했다면, 유중혁은 회귀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영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지금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해요.” 성좌들이 죄다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줄줄이 미래 계획을 읊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사태로 나를 싫어하는 성좌들도 늘어난 상황이니까. 수는 던져 놨으니, 미끼는 저쪽에서 물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인내심이다. 나는 주변의 일행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정리를 좀 할까요?” 기다렸다는 듯, 일행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다가왔다. 신유승을 힐끔거리는 이길영과, 이현성을 부축한 정희원, 살짝 뾰로통한 얼굴로 동떨어진 곳에 서 있던 이지혜. 허공에서 하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시로 보상 정산 진행을 맡게 된 도깨비 ‘영기’입니다.] 신참 도깨비인 듯, 녀석은 살짝 경직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추가 보상을 정산하겠습니다.] 아마 윗줄의 도깨비들이 모두 사라져서, 짬처리를 맡은 모양이었다. [‘엘라인 숲의 정기’를 받았습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작은 열매를, 사람들은 하나씩 쥐었다. [방금 지급해 드린 것은 ‘스타 스트림’의 가장 대중적인 회복약입니다. 설령 중상을 입었더라도 이것을 먹고 잠들면 빠른 속도로 회복이 가능하니, 다들 드시고 푹 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공손한 도깨비는 처음이라, 조금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도깨비는 나와 몇몇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주요 공헌자들에 대한 추가 보상은 금일 저녁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두 수고하셨고, 다음 시나리오도 힘내시기 바랍니다.]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는 열매를 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등장인물들은 또 죽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일행들은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누군가가 총대를 메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고생했습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순간은,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순간으로 남을 뿐이다. 슬픈 건 슬픈 거고, 기쁜 건 기쁜 거다. 적어도 뭔가를 결정한다면, 그 순간은 의미로 남는다. “정말로 고생했어요.” 아무것도 아닌 내 말이 하나의 보상이라도 되는 양, 일행들의 표정에 서서히 안도감이 번졌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제야 입꼬리를 실룩대기 시작한 이지혜가 먼저 말문을 텄다. “······근데 아까 진짜 쩔더라, 아저씨. 아깐 우리 사부보다 쬐끔 더 멋있던데? 인정.” 그 말을 시작으로, 이현성과 정희원도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내 속이 다 시원하던데요?” ······이 양반들, 설마 그 얘길 하고 싶어서 참았던 건가? 시끌벅적 떠들기 시작하는 일행들을 보며 쓴웃음이 나왔다. 초반 시나리오의 가장 큰 위기는 넘겼고, 서울은 지켜졌다. 적어도 당분간, 몇 개의 시나리오가 지나가기 전까지 서울은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독자 씨도 고생하셨어요.” 곁에서 나를 물끄러미 보던 유상아가 환히 미소했다. 어쩌면,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보상인지도 모르겠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부딪친다 싶더니, 신유승이 내 허리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이길영은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신유승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래, 이것도. * 저녁이 되어, 주요 공헌자들에 대한 추가 정산이 시작되었다. 추가 정산을 받을 수 있는 주요 공헌자는 총 셋. 나와 정희원, 그리고 유중혁이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추가 보상은 ‘B급 스킬’입니다.] 그 꼴을 당하고 고작 B급 스킬 하나를 보상으로 받다니, 누가 들었다면 밸런스가 안 맞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밸런스는 충분히 맞다. 알파벳 등급이 낮다고 해서 구린 스킬만 있는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이번 시나리오 보상은 ‘자유 선택’의 형태로 지급된다. 즉, 나는 원하는 B급 스킬 중 하나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B급 중에도 입수 난이도가 높은 스킬은 있고, 나는 이참에 그걸 얻어야 했다. [B급 스킬 목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수만 개가 넘는 스킬들의 목록. 나는 처음부터 생각해둔 스킬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 장애를 피할 수 있었다. [B급 스킬 ‘거짓 간파’를 보상으로 받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희미한 광채가 퍼지며 메시지가 추가되었다. [전용 스킬, ‘거짓 간파’가 스킬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하, 이걸 드디어 얻었다. 그간 [거짓 간파]가 없어서 답답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돌아보니, 정희원도 뭔가를 열심히 고르는 중이었다. 나는 곁에 있던 이지혜를 향해 물었다. “야, 유중혁 어디 갔는지 알아?” “아, 아까 설화 언니 데리고 어디 가던데.” ······이설화랑?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하다는 듯, 이지혜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에휴, 아저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 “진짜야. 내가 줄곧 옆에서 지켜봤다니깐. 두 사람 완전 남이야. 확실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2회차는 확실한데, 3회차의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던가 안 되었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생각보다 유중혁은 고자 루트를 걸은 적이 많았다. 그럼 대체 어딜 간 거지? 여동생 데리러 갔나? [여섯 번째 시나리오는 사흘 뒤 시작됩니다.] 뒤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나는 어쩐지 유중혁이 뭘 하러 간 건지 알 것 같았다. 여섯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드디어 다른 돔의 화신들과 조우하게 된다. 한순간도 쉴 줄 모르는 녀석이니까, 아마 지난 회차에서 입수하지 못했던 몇몇 히든 스킬과 아이템들을 입수하러 갔겠지. 아직 서울 돔 내에는 히든 시나리오들이 제법 남아있으니까. 유중혁에게 빼앗기는 게 조금 속이 쓰리긴 했지만, 그래도 애먼 녀석이 스킬을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남은 시나리오들을 수월하게 깨려면, 녀석은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 맞다. 아까 사부가 아저씨한테 무슨 말 전하라고 했는데.” “나한테?” 고개를 끄덕인 이지혜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자신의 칼자루를 쥐고 근엄한 투로 말했다. “김독자, 맹세 기간은 끝났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존재 맹세. 정신이 없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지 날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 정도도 못하면 난 진짜 못 도와줘. ―맹세한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맹세를 했었지. 이 자식······ 설마 그 맹세 때문에 지금까지 날 안 죽였던 건가? 그러고 보니 그때 이상한 말도 했었는데.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한 대는 때리겠다. 나도 모르게 목울대로 침이 넘어갔다. 혹시 지금 자리를 비운 것도 그거랑 관계된 건 아니겠지? 날 일격에 보내버릴 무지막지한 스킬을 배워 오려고? “근데······ 둘이 무슨 맹세를 한 건데?” “시끄러워.” 그래, 괜히 벌써 쫄 필요 없다. 무엇보다 난 이제 신유승이 쓰던 [야수왕의 감수성]도 있다. 그것도 3레벨이나 되는. ······책갈피로 쓰는 거지만 [바람의 길]도 있고, 게다가 강한 동료들도 있고. 눈이 마주친 이지혜가 이죽거렸다. “알겠지만 사부가 뭔 짓 해도 난 안 도와줄 거야, 알지?” “너한텐 기대도 안 해.” 대신, 나는 든든한 이현성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신유승의 질문 앞에서 유중혁이 아니라 내 일행이라고 말해줄 때는 정말 감동이었다. 이현성은 잠시 곤란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 독자 씨.” “예.”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유중혁 씨가 조금 무섭습니다.” “······아,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생각해 보니 이현성이 이렇게 강해진 건 유중혁이 끔찍하게 굴렸기 때문이었지. 빌어먹을. 하지만 좌절하긴 이르다. 나한텐 정희원도 있다. 원작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내 손으로 직접 키운 동료. 그러자 정희원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내 배후성이 두 사람 싸움엔 끼어들지 말래요.” “······예?” “두 사람을 방해하지 말라는데······ 이거 대체 뭔 소리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갑자기 등골이 섬뜩해졌다. 저 천사 자식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엄중한 눈으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감시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흠칫하며 표정을 바꿉니다.] “독자 씨.”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유상아가 침착한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중혁 씨도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세상 물정 모르는 유상아의 말을 들으며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럴 때 한수영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나를 제외하면 유중혁이 어떤 놈인지 아는 사람은 그 녀석뿐이니까. 뭐, 그 녀석이 있었다고 해도 날 지켜주진 않았겠지만······. 시나리오도 끝났는데,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우리는 잡다한 주변 정리를 끝내고 아이템들을 수거했다. 밤이 깊도록 유중혁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주변 정찰을 나갔던 정희원이 반가운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아직 남아있었습니까?” 정희원이 가져온 것은 6개들이 맥주 페트와 소주병들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럴 때는 한 잔 해야죠. 기념으로.” 우리는 화톳불을 켜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나는 재빨리 맥주에 손을 가져가는 이지혜의 손등을 쳤다. “넌 미성년자잖아.” “······이제 법도 없는데 무슨 미성년자 타령이야?” “넌 애들이랑 사이다 마셔.” 티격태격하는 사이, 술은 빠르게 한 순배를 돌았다. 묘하게 볼이 붉어진 정희원이 술주정을 시작했고, 이현성은 맥주 두어 잔을 마시더니 곰처럼 코를 골았다. 보기보다 술들이 약한 모양이었다. “기분 조타아······.” 몰래 몇 잔을 마셨는지 얼굴이 발갛게 물든 이지혜마저 풀썩 뒤로 쓰러졌다. 의외로 주당인 유상아는 이미 소주병을 네 병째 까서 홀짝이는 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 술 세거든요.” 그러고 보면 회식 자리에서 유상아가 한 번도 취한 걸 본 적이 없다. “······함부로 취하면 곤란하니까요.” 그 말에 담긴 비감이 슬펐다. 회사에는 유상아한테 술을 먹여서 어떻게 해보려는 놈들만 득실거렸으니까. 어쩌면 그녀가 마음 놓고 술을 마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괜찮겠죠?”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하얗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그 눈을 피했다. 하늘에는 고적한 달이 떠 있었고, 오늘만큼은 괴수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에는 우리 말고도 술판을 벌이는 그룹들이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마시는구나 싶었는데, 이런 상황이니까 마실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들,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세상이다. 내 술잔 위에 작은 스파크가 튄 것은 그때였다. 파츳, 파츠츳. 놀란 유상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술을 마시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쏟아진 술이, 장난이라도 치듯 바닥에 문자를 그렸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과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드디어 올림포스가 미끼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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