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109화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집행부의 긴급 구속. ‘멸살법’에 따르면, 그러한 긴급 구속 조치가 시행되는 것은 도깨비가 시나리오 개연성에 크게 위배 되는 행동을 저질렀을 때뿐이다. [중급 도깨비 바울. 지금부터 네 신병은 ‘집행부’에 인도될 것이다. 너는 관할 시나리오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메인 시나리오에 관한 모든 진행권을 박탈당할 것이다.] 무기질적으로 이어지는 그 대사에, 중급 도깨비 바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너는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시나리오의 공적치를 잃고 ‘하급 도깨비’로 강등될 것이며, 그리고 징벌의 죗값으로······.] [가, 강등?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보십시오!] 중급 도깨비 바울이 다급히 그 말을 제지했다. 그는 억울한 눈빛으로 나와 주변의 도깨비들을 쓸어 보더니 외쳤다. [갑자기 ‘강등 조치’라니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려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집행부의 또 다른 도깨비가 물었다. 그 위엄에 바울은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목소리를 냈다. [모르겠습니다. 대체 뭐가 문젭니까?] 심지어, 놈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성좌분들을 보십시오. 다들 즐거워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훌륭하게 시나리오를 끝냈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신만만한 바울의 말에, 도깨비 집행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개연성에 문제는 없습니다. 저는 성좌님들의 동의를 얻어 시나리오 강제 집행에 들어갔고, 말씀드렸다시피 성좌님들도······.] [······이야기꾼 새끼들은 이런 게 문제야. 그놈의 성좌 타령.] 모든 도깨비가 ‘성좌’를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집행부’의 도깨비들중에는, 한때 ‘성좌’였던 존재들도 있는 까닭이다. 성좌였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신의 격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도깨비로 살아가게 된 존재들. 그들이 바로 집행부의 도깨비들이다. 자신의 고객들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바울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까불지 마라, 바울.] [아무리 집행자라 해도, 제 고객들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없습니다.] 기세를 탔다고 생각했는지, 바울이 말을 계속했다. [집행자들께서 오신 이유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시나리오 강제 집행권’을 사용했기 때문이겠죠.] [‘시나리오 강제 집행권’은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함께 감당해 줄 때만 쓸 수 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연성 후폭풍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좌님들의 만족도만 높다면 그 부분은······.] [만족도? 바울, 네놈의 꼴을 보고 말해라.] 그 말에 바울이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파츠츠츠. 얼굴이 창백해진 바울이 고개를 들었다. [이, 이건······?] 주변 공간에 일렁이는 푸른색 스파크. 개연성 후폭풍의 전조였다. [어째서 개연성 후폭풍이······?] 개연성 후폭풍은 흐름을 거스른 징벌. 지금 세계의 개연성은 바울의 존재를 지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집행자 도깨비가 뾰족한 송곳니를 세우며 웃었다. [집행권은 도깨비의 권한 중 가장 큰 개연성을 요구하는 힘이다. 그런 권한을, 이런 조잡한 억지 전개에 사용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바울. 네놈은 ‘집행권’을 사용하지 않고도 시나리오를 끝낼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전개였지. 왜 그걸 막은 것이냐? 네놈의 만행으로, 서울 돔의 관리국에 비상이 떨어졌단 말이다.] [그, 그건······ 아니, 잠깐만요. 저는 분명 성좌님들의 의견에 따라 집행권을 발동했단 말입니다!] 다급해진 바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성좌님들! 아까 제 전개에 동의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좌들은 대답이 없었다. [······성좌님들?] 그토록 많았던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그 순간만큼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왜?] 녀석의 전개를 지지하던 성좌들이, 모두 한반도의 채널에서 떠난 것이었다. 집행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한 놈이군. 성좌들이 사라진 줄도 몰랐던 거냐?] 놈을 선동하고, 나를 죽이기를 원했던 많은 성좌들은 시나리오의 결말이 ‘신파’로 바뀌는 순간 한반도의 채널에서 대거 이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원하지 않는 전개가 등장했는데, 그걸 계속 보고 있으면 이상한 일이니까. 실제로 비형의 채널 역시 삼분의 일에 가까운 구독좌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남은 존재들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중급 도깨비 ‘바울’을 노려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중급 도깨비 ‘바울’을 보며 킬킬 웃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중급 도깨비 ‘바울’을 조롱합니다.] ······. 모두, 중급 도깨비의 전개에 동의하지 않았던 성좌들이었다. [아, 안돼. 이대로 소멸할 수는 없습니다. 집행자님들!] [걱정마라. 네놈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 그렇다는 말씀은······?] 잠깐이지만 바울의 표정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집행자 도깨비는 그 빛을 무참히 꺼버리듯 말을 이었다. [너는 소멸보다 더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네놈 때문에 우리 관리국이 막대한 개연성의 빚을 떠안게 되었으니까.] 집행자 도깨비가 바울의 신병에 [구속 코드]를 입력했다. 그러자 영체였던 도깨비 바울의 본체가 강제로 세계에 소환되었다. 중급 도깨비 바울이 벌벌 떨며 반항을 시작했다. 방송용 목소리를 잃은 녀석의 육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건 음모입니다. 이렇게 될 리가 없어!” 녀석의 곁에 있던 비형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시나리오를 빨리 끝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형!” 결국 바울이 폭발했다. 구속 코드를 붙든 채 허우적거리던 바울이 비형을 손가락질했다. “집행자시여! 저놈도 체포하십시오. 저놈의 채널이 스타 스트림의 규칙을 어겼다는 증거를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도 함께 갈 것이다.] 그 말에 바울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람 말도 도깨비 말도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이다. [우릴 호출한 이가 바로 도깨비 비형이니까.] “그게 무슨······ 설마?” 집행자 도깨비가 말했다. [네놈을 신고한 도깨비가 바로 비형이다.] 붉으락푸르락하는 바울을 향해, 비형이 짧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행자 도깨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도깨비 비형. 아주 훌륭한 도깨비지. 거적 하나만 걸친 저 겸손함을 봐라. 모든 것을 도외시하고 시나리오에 몰두하는 저런 청렴함이야 말로, 이야기꾼의 효시인 것이다. 도깨비 주제에 명품 정장이나 입고 있는 네놈과는 아주 다르지.] 그 말에 비형이 쑥스러운 표정을 했다. 녀석도 몰랐겠지. 자신의 가난함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아, 아닙니다! 비형 저놈은 그런 녀석이······ !” [닥쳐라.] 구속 코드에 묶인 바울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정색한 집행자 도깨비가 말을 이었다. [네놈은 앞서 두 번의 징계를 받았지. 이번이, 네놈의 세 번째다. 세 번째의 징벌이 무엇인지, 네놈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 “이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내 상관께서 이걸 허락하실 것 같습니까? 당신들, 지금 실수하는 겁니다. 지금 나를 건드리면······.” [헛소리는 관리국에 가서 마저 듣도록 하지.] 허공에서 빛나는 포탈이 열렸다. 마침내 중급 도깨비 놈과도 작별의 때가 다가온 것이다. 아마 이제, 앞으로의 시나리오에서 놈을 볼 날은 없겠지. 이글거리는 놈의 눈빛이 내 쪽을 쏘아보았다. 그 눈과 마주한 순간, 내 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감정의 고조로 인해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재가 되어 흩날리던 미래의 신유승. 만약 중급 도깨비만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녀의 회차로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했겠지만, 이 세계를 새로운 회차로 삼아 변해갈 세계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중급 도깨비는, 그 마지막 가능성조차 짓밟아버렸다. 지금 내가 입을 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 놈은 죽음에 준하는 형벌을 받겠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내 말에 깜짝 놀란 일행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를 부른 건가?] 놀라기도 하겠지. 일개 화신이 집행부의 도깨비들을 멈춰 세울 줄은 몰랐을 테니까.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집행자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 네가 그 ‘김독자’라는 화신이로군. 그렇지?] 다른 도깨비가 물었다. [아는 놈이냐?] [최근 이 근방에서 유명한 화신이다. 반도 내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인데, 아직까지 배후성 계약을 안 했다더군.] [호오······?] 멋대로 떠드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곧장 [도깨비 통신]으로 비형에게 말을 걸었다. ‘비형. 10만 코인을 주겠다.’ ―뭐······? 집행자 도깨비들을 따라가던 비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를 [도깨비 보따리]의 플래티넘 멤버로 승급시켜.’ ―아니, 갑자기 왜? ‘잔말 말고.’ ―제기랄······. 다가오는 집행자들을 보며, 나는 비형을 재촉했다. 한숨을 쉰 비형이 허공에 뭔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100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도깨비 보따리’의 플래티넘 멤버가 되었습니다!] 본래는 화려한 축포와 함께 승급 이펙트가 있었지만, 나는 비형에게 부탁해 그것들을 생략했다. 겨우 5000코인으로 승급이 가능하던 [골드 멤버]와는 다르게, [플래티넘 멤버]부터는 대우 자체가 달라진다. [그래, 화신 김독자. 왜 우릴 부른 거지?] 아직 내 승급 여부를 모르는 집행자들이 내게 물었다. 다른 도깨비들과는 달리 덩치가 산만한 녀석들이라, 마주한 것만으로 긴장이 되었다. 지금은 격을 잃고 심하게 퇴락했지만, 이 녀석들 중에는 본래 위인급 성좌였던 녀석들도 있으니 무리는 아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도깨비 독대(獨對)’를 요청한다.” [뭐?] 내 말에 당황한 집행자 도깨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독대’는 플래티넘 이상의 멤버만이 요구할 수 있는······. 설마?] “그 설마가 맞아. 확인해 보든가.” 그 말에, 두 도깨비가 다시 한 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스템을 조작해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하더니, 이내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이군.] [대체 어떻게 화신이 플래티넘의 멤버로······?] “이제, 자격은 충분하겠지?” 잠시 망설이던 집행자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어떤 도깨비와 ‘독대’를 원하는가? 플래티넘의 자격으로는 준 상급 도깨비까지 독대가 가능하며, 약속 일정은······.] “잡을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녀석은 지금 너희들이 데리고 있으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내가 원하는 도깨비를 가리켰다. “나는 중급 도깨비 ‘바울’과의 독대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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