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106화
[죄송하지만, 그건 조금 곤란하겠군요.]
슬슬 녀석이 나올 타이밍이 됐다고 생각은 했다.
빌어먹을 중급 도깨비.
서울 돔 시나리오 전체를 관리하는 녀석이 이런 사태에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지.
하지만 나는 조금 자신이 있었다.
“왜 곤란하다는 거지? 우린 시나리오 규정을 어기지 않았어.”
[‘재앙’을 살려두다뇨? 제정신입니까? 죽고 싶으신가 보군요.]
“죽긴, 그 반대야. 전부 다 살려고 이러는 거지.”
내 말에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조금씩 딱딱해졌다.
[그게 규정 위반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시나리오의 내용은 ‘재앙을 처치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시나리오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건 걱정마, 재앙은 죽일 거야.”
내 말에 일행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지금 무슨······?”
특히 이지혜는 무슨 사이코패스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까는 안 죽인다고 했다가, 이제는 죽인다고 하니 그렇게 보일 법도 하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일행은, 이어질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뢰감 어린 침묵에 기분이 조금 머쓱해졌다.
“단, 지금은 아니야.”
[무슨······?]
“시나리오엔 분명 ‘제한 시간 없음’이라고 명시되어 있을텐데? 그러니, 재앙을 처치하는 시기는 우리 마음대로란 얘기지.”
중급 도깨비는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재촉하지 말라고.”
재앙 신유승이 나를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설마, 그런 발상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묘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들의 동요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에 반발하는 에피소드는 ‘멸살법’ 전체를 뒤져도 많지 않으니까, 성좌들로서는 요긴한 볼거리일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선악(善惡)의 구분이 모호해 보이는 상황은 더욱 그렇다. 절대선이나 절대악 계통 성좌들의 구독수는 압도적으로 올라갈 테지. 자기들 맘대로 등장인물의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바로 놈들의 일상이니까.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또 시나리오에 간섭하려고? 지난번에 그랬다가 어떻게 됐는지 다 잊었나?”
[······.]
내 자신감은 이 시나리오가 ‘서브 시나리오’가 아니라 ‘메인 시나리오’라는 것에 있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처럼 메인 시나리오 규모가 돔 크기로 진행되면, 아무리 중급 도깨비라 해도 시나리오 조건을 변경하기가 까다로워진다. 게다가 중급 도깨비 녀석은 이미 관리국으로부터 몇 가지 징계를 받은 상태.
녀석이 관할 시나리오의 징계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에게 아주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나는 근처에서 손톱을 뜯고 있는 비형을 보았다.
‘준비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믿을 건 너뿐이니까.’
―빌어먹을, 내가 왜?
‘죽어도 같이 죽는 거니까 잊지 마라.’
비형이 울상을 지을 찰나, 중급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역시 재미있군요. 하지만 당신 생각대로는 안 될 겁니다.]
그래,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줄은 알았다.
[서울 돔의 화신 모두가, 당신과 같은 생각은 아닐 테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중급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메인 시나리오’를 건드릴 수 없다면, 자신이 설정할 수 있는 ‘서브 시나리오’로 승부를 보려는 것이겠지.
[지금부터 ‘재앙’에 걸린 현상금을 두 배로 올리겠습니다.]
본래 보상 코인이 10만 코인이었으니, 그 두 배면 20만 코인이다.
단숨에 서울 돔의 톱랭커에 올라설 수 있는 코인.
저 정도면 목숨을 걸고 달려들 법도 한데······.
웬일인지, 달려드는 화신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목숨을 소중히 하라. 부나방처럼 죽어가고 싶지 않으면!
세력을 가진 왕들이 화신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미희왕 민지원과, 미륵왕 차상경. 거기다 중립의 왕 전일도까지.
[성좌, ‘해상전신’이 한반도의 화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물론 왕들이 통제할 수 없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목숨이 아까운 것은 매한가지. 이미 ‘재앙’의 힘을 보았으니, 10만 코인이든 20만 코인이든 소수 인원으로는 덤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거기다 우리 일행까지 ‘재앙 신유승’을 감싸는 형국이었으니······.
[······실망이군요. 서울 돔의 화신 여러분이 이렇게 겁쟁이일 줄이야.]
상공에서 불길한 공기가 떠돌았다. 중급 도깨비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더 최악으로 끌어갈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재빠르게 첨언했다. 이쯤에서, 승부를 봐야만 한다.
“네가 양보하지 그래? 솔직히 이만하면 다들 만족했을 거 아냐?”
[······다들 만족했다?]
나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중급 도깨비는 이미 이해했을 테니까.
[하하, 그렇군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역시, 독각에게 들은대로 연출의 대가답군요.]
도깨비의 존재 이유는 시나리오에 있다.
많은 성좌들이 호응하고, 많은 성좌들이 좋아하는 시나리오.
‘스타 스트림’의 세계에서 시나리오의 방향이 틀어지는 기적은, 단 한 경우에만 발생한다.
바로 그 시나리오를 보는 대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방향이 바뀌기를 원하는 경우다.
[······확실히 ‘폭력’만이 자극의 전부는 아니죠.]
‘재앙 신유승’을 구하며, 나는 성좌들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가능한 필터링을 피해갈 수 있을 법한 단어들을 골라서 사용했고, 성좌들에게 어느 정도의 정보 노출을 각오하며 발화를 거듭했다.
나는 그들이 ‘재앙 신유승’을 동정하게 만들었고.
내 반항을 응원하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모든 상황에 탄식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내 귀에는, 내 작전에 걸려든 성좌들의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뜻을 존중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당신의 의지에 감탄합니다.]
모든 게 계획 대로였다.
“알았으면, 이제 슬슬 결정하지 그래? 보상을 주든가, 아니면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계속하든가 하자고.”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계속되더라도, 여섯 번째 시나리오를 이어가는 것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메인 시나리오는 중복 실행이 가능하니까.
녀석도 생각이 있다면 성좌들이 만족한 이쯤에서 그만두겠지.
[화신 김독자. 당신은 내가 아는 모든 화신들 중 가장 영리하고 무서운 인물입니다.]
점차 풀어지는 중급 도깨비의 표정에서, 나는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영리함이 당신의 발목을 붙잡겠군요.]
“······무슨 뜻이지?”
이어진 중급 도깨비의 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성좌님들. 슬슬, 기다리시던 이야기를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파츠츠츠츳!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중급 도깨비가 시나리오를 움직이고 있었다.
[중급 도깨비가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시나리오 계약에 따라, ‘범람의 재앙 신유승’의 통제권이 중급 도깨비에게 이양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에, 재앙 신유승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 안돼. 잠깐만. 나는······ 아아아악!”
재앙 신유승의 몸에서 검은 아우라가 솟아나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 지금 무슨 짓을······!”
[계약을 이행하십시오. 시나리오의 톱니바퀴여.]
그제야 나는 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시나리오 강제 집행권.
시나리오에 포함된 모든 ‘부속’들의 운명을 가누는 힘.
나도 ‘멸살법’을 보았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걸 곧바로 사용할 줄은 몰랐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강제로 변화합니다.]
[등장인물 ‘신유승’의 성향이 ‘악(惡)’으로 고정됩니다.]
육체를 빼앗긴 재앙 신유승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나리오 강제 집행권은 도깨비의 개연성 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전개에 환호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신파를 싫어합니다.]
많은 성좌들이 이 전개의 개연성에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독자 씨?”
“형!”
긴장한 일행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들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성좌들이 갑자기 등을 돌린 거지?
허공을 보니 비형의 표정이 어두웠다.
―미안, 설득했는데 잘 안 됐어.
‘대체······.’
―예상보다 네 평판이 너무 나빠.
중급 도깨비가 말했다.
[오만한 화신이여. 성좌들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줄 알았습니까?]
······하지만 간접 메시지들은 모두 호의적이었는데?
[하긴, 인간은 원래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는 습성이 있죠.]
나는 연이어 떠오르는 간접 메시지를 보며, 나의 오판을 절감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결정을 비웃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합니다.]
그렇다.
모든 성좌들이 간접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성좌들은 극히 일부뿐.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의도를 경계합니다.]
대다수의 여론이 내게 나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알량한 기만으로 그들을 속였고, 이벤트를 취소했다.
비형 채널의 정원이 9999였다는 것은, 눈치 빠른 성좌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그들은, 내 시나리오를 보기 위해 속아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은 속아주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측은하게 바라봅니다.]
어쩌면, 나는 성좌라는 존재들을 너무 얕봤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운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화신 김독자.]
“아아아아아―!”
강제로 악인화가 진행된 신유승의 몸에서, 불온한 아우라가 흘러 나왔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녹아 버릴 듯한 살기. 화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멀리서, 유중혁이 진천패도를 뽑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까지 좋은 시나리오를 보여주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재앙으로부터 천천히 물러났다.
슬프게 일그러진 신유승의 얼굴.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나는 재빨리 유중혁의 동태를 살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놈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뻔한 것이었으니까.
“잠깐만, 유중혁.”
“네놈은 실패했다.”
“아이는 건드리지 마라.”
나는 어린 신유승을 등 뒤로 숨기며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아이를 건드린다면,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눈을 가늘게 뜬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달리 방법이 없다.”
방법······.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은 있어. 성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시나리오를 보여주면 되니까.”
“······무슨 소리냐?”
“재앙을 물리치면 된다.”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살 행위다 김독자. 만용을 부릴 셈인가?”
나는 악마처럼 변해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대는 신유승을 보았다.
이렇게 되길 원하지 않았다.
이런 결말을, 결코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는, 시나리오에 저항하는 것조차 하나의 시나리오가 된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발언에 흥분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통쾌한 난투극을 원합니다.]
그래, 너희들이 이것을 보고 싶다면.
“원호해라 유중혁. 내가 재앙을 막겠다.”
얼마든지, 연기해 주마.
“김독자, 너는······.”
“할 수 있다.”
서서히 눈을 깜빡이자, 미뤄뒀던 선택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은 ‘1인칭 조연 시점’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신이 몰입했던 조연의 스킬 중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획득할 수 있는 스킬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획득할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목록을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선택지를 골랐다.
“3번. ‘야수왕의 감수성’을 선택한다.”
[전용 스킬, ‘야수왕의 감수성’을 획득하였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재앙 신유승의 손에서 에테르의 폭풍이 몰아쳤다. 내 배에 구멍을 뚫고, 유중혁조차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던 그 에테르의 폭풍.
쿠콰콰콰콰콰!
나는 일행들을 보호하며, 전면에서 폭풍을 받아냈다.
[전용 스킬, ‘야수왕의 감수성 Lv.3’이 발동 중입니다.]
새하얀 백색의 털망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비스트 로드 신유승의 고유 스킬. 절반 이상의 마력이 빨려 나가며 일순 현기증이 일었지만, 나는 신유승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강대한 폭풍 속에서도 ‘야수왕의 감수성’은 조금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스킬을 훔쳤군. 하지만 그것 하나로는 무리다.”
“알아.”
나는 재앙 신유승을 바라보았다. 악인화가 진행되어 육체의 통제력을 잃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나를 죽여줘.」
누가 그 눈을 보며 검을 휘두를 수 있을까.
천년의 세월을 헤매고 또 고통받았던 여자.
나는 이제 그녀를 베어야 했다.
이것이, 이야기를 바꾸는 것에 실패한 대가······.
나는 처음으로 ‘멸살법’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워졌다.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봐라.”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너희들이 원하는 시나리오니까.”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신유승의 마지막 페이즈가 열린 이상, 이 싸움은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결국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인물 책갈피’가 활성화됩니다.]
[사용 가능한 책갈피 슬롯 : 4개]
[활성화 가능한 책갈피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1번 슬롯에 ‘망상악귀 김남운’을 해제하고,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을 넣겠다.”